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그 특사 (문단 편집) ==== 신임장의 어새 위조와 특사자격 논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23276_61093_854.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23728309466_20090318.jpg|width=100%]]}}} || || {{{-1 이준 일행이 가져간 위임장(위)와[br]실제 고종의 어새(아래)}}} || 2007년 조선일보는 헤이그 특사가 가져간 신임장에 찍힌 고종 황제 어새의 날인이 위조되었다고 보도하였다. >하지만 이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인장이 위조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서울에서 제기됐다. 서지학자인 이양재 이준열사순국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총무이사는 “신임장에 찍힌 황제의 도장인 어새(御璽)는 진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그는 “황제의 다른 친서와 비교해볼 때 전각의 글자체가 크게 다르고, 도장을 찍은 게 아니라 붓으로 그려 번진 것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전각 전문가인 정병례 고암전각예술원장도 사진을 본 뒤 “ ‘제(帝)’자 윗부분의 획 길이나 간격이 고르지 않고, ‘새(璽)’자 역시 가운데 뚫린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다른 문서의 어새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대단히 어설픈 실력으로 만든 모작(模作)”이라고 단정했다. > >어떻게 된 것일까?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내가 보기에도 신임장의 어새와 수결 모양은 이상하다. 그러나 황명(皇命)이 없이 특사 활동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신임장에 고종의 의중이 들어 있었을 것이고, 임무를 구두로 전달하고 나중에 적게 한 백지 위임장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 >일본군이 궁궐을 에워싼 채 물샐틈없이 황제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그르칠 경우 뒷감당을 할 수 없었던 고종으로선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이고, 촉박한 만국평화회의의 일정에 발을 구르던 밀사들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23/2007062300024.html|#]] 이에 대해 학계는 이준이 3월 24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 황제를 극비리에 만나 특사 임무를 부여받았고 이후 누군가 황제 어새의 날인을 모작한 신임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임장의 수여여부와 모작의 주체가 누군지는 설이 갈린다.] 한편 2021년 출간된 [[조선레지스탕스의 두 얼굴]]의 저자 진명행은[* 저자 진명행은 역사전공자가 아닌 것과는 별개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 [[https://twitter.com/kimkyochon/status/1168610558137864193|시민군을 폭도로 지칭]]하며 지만원을 지지하는 의사를 표하는 등 [[5.18 민주화운동/왜곡/무장폭동설|광주폭동설]]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그 외 역사적 견해나 성향에 관한 것은 개인 블로그와 저널 참조.] 이와 함께 몇 가지 근거를 더 들면서 이준이 고종으로부터 임명받은 헤이그 특사가 아님을 주장했다. 하나는 이준이 1907년 4월 22일에 출국한 뒤인 그해 4월 말 고종의 측근이자 황태자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이 고종의 명으로 러시아 영사인 플란손을 만나서는 자신이 헤이그 특사라고 밝힌 적이 있고 이것이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kifr.d_0004_0290_0010|플란손 문서(국문본)]]에 적혀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 작성자인 플란손이 "하지만 다른 무리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애국심이든, 아니면 사리(私利) 때문이든, 또는 어쩌면 황제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것이든, 국제회의에 가겠다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라고 기록했기 때문에 윤택영과 권신목, 이용익의 손자와 이종호 무리과 함께 이준 역시 언급되므로 헤이그 특사에는 여러조가 계획되어 있었다고 파악할 수 있고 특사가 황제의 직접 명령인지 아닌지는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일제가 이준 일행에 대해서 보고한 문서의 내용에 의거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前 평리원 검사 이준과 의관(議官) 나유석은 간도관리사 이범윤 등이 이곳에서 번번히 재류 한국인 간에 배일 사상을 고취시키는 사실에 관하여 지난달 29일자 機諸 제5호로 보고한 바입니다. 이번에 이 자들의 협의결과, 前 학부협판(學部協辦) 이상설이라는 자가 북간도에 있으면서 학교를 사설(私設)하고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임하고 있던 중에 이곳에 불러들여 다시 모의를 짜낸 결과, 한국의 장래에 관하여 직접 러시아 정부에 탄원하기 위해 위원을 간선하여 파견한다는 의논을 결정한 후, 전기 이준, 이상설과 이곳의 부호 차석보(車錫甫)와 아들 某 외 3명은 결국 지난 21일 이곳을 출발하여 러시아 수도로 향한 바 있습니다. 그 탄원의 요지라는 것을 듣건대, "근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심한 압박과 특히 러시아령 연해주 방면에서의 한국인 모두가 일본 무역사무관의 권한 내에 속하도록 하기 위한 형세에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보호와 단속 개시에 관하여 이후 일본 무역사무관이 러시아 정부에 어떠한 조회가 있을 경우에도 반드시 거절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또 파견위원은 만국평화회의 개최를 기회삼아 헤이그(海牙)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열국의 전권 위원 사이에서 운동한 바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운동은 당초부터 아이들의 장난과 같으며 그와 같은 우매한 행동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또 이로 인하여 이 지방에서 배일파의 소식의 일단을 게시(揭示)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참고를 위하여 보고합니다. > >機密第六號, "前 韓國學部協辦 李相卨 및 李儁, 李範允 등에 관한 件" 1907년 05월 24일, 통감부 문서 제3권 세 번째로 저자는 책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p.79 >러시아의 수석 대표이자 평화회의의 의장이었던 넬리도프는 헤이그 특사단 일행이 황제가 보낸 특사인지 의심했고, 일본 역시 이들 특사단이 소지한 신임장의 진위에 대해 의심 합니다.[* Willem Henrik de Beaufort의 일기와 메모 1874-1918, 꾼 드 퀘스터,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성공과 좌절, 한국사학보(30), 고려사학회 2008, p.321에서 재인용 1907년 7월 11일, 來電第139 號 "헤이그에 파견된 詐稱 한국 使節의 행동에 관한 件"] 일본의 외무대신인 하야시 다다스(朴董)가 이토에 발신한 전보에 따르면 이들 특사가 '사칭'된 한국 사절이라는 뜻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준 일행이 황제가 파견한 특사가 아니라는 것을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다고 봐야겠죠.[* "헤이그에 파견된 詐稱 한국 使節의 행동에 관한 件". 來電第139 號, 1907년 7월 11일] > 일본은 애초에 이준, 이상설 일행이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갔다가 러시아 황제에 탄원을 올리고 헤이그로 갈 것이라는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이 헤이그에서 물의를 일으키도록 고의로 내버려둔 것이라는 학계의 지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한성민의 연구를 참고할 만하며 그 외에 김지영, 한철호, 무라세 신야(村瀬 信也)의 연구가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짜 특사인 것을 알면서도 고종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그 결과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큰 그림이 있었기 때문이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